이야기의 힘, 한국문학의 저력
― 황정은,『야만적인 앨리스씨』, 문학동네, 2013
유희석(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황정은은 한국사회의 고단하고 빠듯한 사람들에 드리운 짙은 어둠을 끈질기게 응시하면서 그 어둠에서 희미하게 밝아오는 삶의 양상을 시적으로 감지하는 작품을 다수 써냈다.『야만적인 앨리스씨』도 그중 하나이다. 문장은 거침없고 투박하면서도 세심하고 섬세하다. 이런 문장들의 행간에 때때로 묵직한 침묵도 실리는데, 경청하는 독자라면 작중에 그려진 인물들의 각양각색 모습과 이들이 제각각 처한 현실을 거의 저절로 곱씹어보게 될 것이다. 다채롭게 변주되면서 앨리시어가 마주한 상황에 직간접으로 가닿는―간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연상되는―옛날이야기들은 또 다르다. 동생이 졸라대는 통에 들려주는 앨리시어의 이야기 말이다.
그런가 하면 그가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서두부터 튀어나오는 “그대”라는 호명도 묘하게 독자의 마음을 건드린다. 이것도 단순히 말을 붙이기 위해 부르는 게 아니다. 앨리시어의 이야기를 따라 읽는 ‘나’를 상대로 ‘당신은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식으로 작가 자신이 취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기 때문이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라고 반복적으로 묻고 “고모리를 기억하나”라는 말을 던지고 “다시 말해볼까”라는 식으로. 어떻게 보면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을 당신은 정말 제대로 읽고 있기나 한 건가 다그치는 것 같기도 하다. 서사가 진행되다가 잊을 만하면 밑도 끝도 없이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라고 거듭 되묻고 있는데, 어디라니, 도대체 어디가 어디고, 어디까지는 또 뭐가 어디까지라는 말인가?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나『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도 독자를 제각각 특이한 방식으로 의식하고 있지만 이 경장편이 ‘유인’하는 방식은 확실히 색다르다. 소설의 인물이나 상황에 대해 독자의 공감을 자아내고 투사하도록 유도하는 관습적인 서사를 아예 거부하는 것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내 이름은 앨리시어”로 시작하지만 앨리시어와 그 주변은 이내 3인칭 시점으로 묘사된다. 1인칭 화자에서 3인칭으로 급전환한 셈인데, 단 한번이지만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이제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놓친 채로 밤 속에 남는다.”(78쪽)라는 문장이 보여주듯이 앨리시어와는 다른, 작가 자신인 화자도 존재한다.
이런 이야기방식을 통해 황정은은 더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가학과 피학으로 얼룩진, 피폐하고 누추하고 불결한 고모리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면서 이 학대를, 이 야만을, 이 자기기만을, 이 “씨발됨”을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 같다.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밀어낼수록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8쪽), 홈리스이자 여장남자인 앨리시어의 악취를 우리 코앞에 들이대면서. 확실히 이 장편은 위안과 희망이라는 한국문학의 익숙한 서사에 길들여진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고 불쾌하게 도발한다.
앨리시어의 그런 체취로 가득 찬 듯한 고모리라는 지명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묻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물음이다. 고모리는 1970년대 이래 개발과 재개발 속에서 온갖 복마전이 벌어졌던―지금도 벌어지고 있는―모든 변두리지역의 대명사와 같다. 드난살이로 떠도는 뜨내기들이 주민들과 뒤엉켜 살아가는 그와 같은 현장은 1980년대 노동문학에서는 노사의 대립과 생존투쟁이 가열차게 전개되는 장소인 동시에 혁명적 낙관주의를 고취하는 소재였다. 단적으로 김한수의 중편「성장」(1988)이 떠오른다. 황정은은 그런 낙관주의가 이젠 ‘역사’라는 듯이 억압과 착취에는 이골이 난 만큼이나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데는 귀신같은 사람들의 민낯을 낱낱이 비춘다.
작품에서 결정적 사건은 물론 앨리시어 동생의 의문사다.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반복해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들이 ‘본 이야기’의 변주를 이루면서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펼쳐지다 앨리시어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에서 작품은 종결된다. 이런『야만적인 앨리스씨』를 개발 호재에 다들 돈독이 오른 고모리라는 도시변두리에서 일상적으로 ‘씨발 상태’로 급발진하는 엄마의―아빠의 수수방관 속에서―폭력에 시달리는 아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팔푼이 같은 동생의 의문사라고 정리하면 얼마나 허망한가.
미묘하고도 함축적인 묘사와 대화로 구성된 작품은 1980년대와는 사뭇 달라진 2010년대의 변두리지역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면서 앨리시어가 직면한 ‘폐허’가 어쩌면 우리 자신의 내면에도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묻게 한다. 앨리시어와 고미에게 가정폭력의 내력과 가족의 화목을 권고하는 상담사의 ‘사회학적 설명’도 그런 폐허의 일부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다른 한편『야만적인 엘리스씨』에는 개발의 속도전 속에서 피폐하고 가난해진―앨리시어의 부모가 참담할 정도로 드러내는―‘마음의 황지(荒地)’에 맞서는 씨앗도 뿌려져 있다. 성소수자로 살아갈 운명인 고미의 소박하고도 따듯한 마음씨도 그중 하나지만 앨리시어와 ‘야’라는 호칭으로 남은 동생 사이의 결코 간단치 않은 우애도 독자의 가슴에 뿌리를 내린다.
하지만 작품의 신축자재한 서사는 그런 마음씨와 우애의 세계에 자족하면서 독자를 다독이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앨리시어의 고통에 마침표를 찍는다. 작품 끄트머리의 한 문장은 이렇게 쓰여 있다. “이제 그대 차례가 되었다, 이것을 기록할 단 한 사람인 그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의문사로 처리되는 동생의 최후와 여장한 채 “씨발년”으로 거리를 떠도는 홈리스 앨리시어의 모습을 그리면서 황정은의 시선은 “단 한 사람인 그대”로 향한다. 이 소설이 가리키는 고통을 소비하지 않는 독자만이 앨리시어의 ‘야만됨’과 동생의 ‘작은 승리’를 제대로 성찰하고 기억해주리라는 믿음이다.
도발적인 화법과 냉철하면서도 뜨거운 관조가 어우러진『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우리사회의 가려진 피폐한 주변부 현실과 짓밟힌 생의 폭발적 욕구에 관한 이야기이다. 최근 우리에게 찾아온 커다란 경사의 명암을 온전히 숙고해야 하는 우리에게 황정은의 소설은 그런 경사도 우연이 아님을, 한국문학의 여전한 저력을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