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08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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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남성성/들을 ‘관계’로 바라보기

― R. W. 코넬, 『남성성/들』, 안상욱·현민 옮김, 이매진, 2013

김소라(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강사)

최근 우리 사회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정치적 성향과 실천,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를 선동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남성성’이라는 틀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와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그간 페미니스트들은 한국 사회에서 발견되는 남성성의 특성을 ‘식민지 남성성’으로 이해하고, 젠더폭력에서 발견되는 남성성과 폭력 간의 관계를 ‘유해한 남성성’이나 ‘고어 남성성’ 등으로 부르려는 시도를 해온 바 있다. 하지만 안티-페미니즘을 중심으로 온라인에서 세력화한 젊은 남성들이 특정 정치 세력에게 표를 던지는 것을 넘어 폭력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이것이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남성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더욱 폭넓게 형성되었다. 실제로 12.3 내란 이후 결집한 극우 세력 중 20~30대 남성이 상당수였고, 윤석열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는 이유로 서부지방법원을 공격한 이들은 ‘국민저항권’ 행사라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등 질서유지를 이유로 계엄의 필요성을 옹호했다. 21대 대통령 선거 출구 조사에서 보수 진영 후보 지지율이 가장 높게 나타난 것도 20대 남성(이준석 후보 37.2%, 김문수 후보 36.9%로 도합 74.1%)이었다.

호주의 사회학자인 코넬의 저작 『남성성/들』(1995)은 이 같은 남성성의 이론, 현실, 역사를 복합적으로 다루고자 한 고전적 시도로, 남성성을 하나의 연구 분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1980~90년대에 이루어진 남성성에 관한 여러 선행 연구 그리고 같은 시기 코넬이 실시한 생애사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 책과 현재 사이에는 30~40년의 거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같은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첫째, 성차별 구조를 분석하는 페미니즘의 이론적 흐름 속에서 남성성 연구가 갖는 위치와 함의를 이해하고, 둘째, 최근 다양한 방식으로 대두하고 있는 남성성 연구를 위한 통찰력을 얻는 유용한 통로가 될 수 있다. 그 핵심에 젠더라는 ‘관계’, 남성성/들 간의 ‘관계’에 대한 코넬의 이해가 있다.

무엇보다 코넬의 연구는 페미니즘 이론이라는 유산 위에서 가능했다. 생물학적 여성-여성성-여성 종속, 생물학적 남성-남성성-남성 지배 사이의 연관성을 전제로 차별의 구조를 상정했던 이전과 달리, 1980~90년대 조앤 W. 스콧(『젠더와 역사의 정치』, 후마니타스, 2023)과 주디스 버틀러(『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24) 같은 이론가를 중심으로 젠더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자리 잡았다. 이들은 젠더가 단순한 성역할 규범이나 이를 통해 할당되는 특질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 사이의 관계를 조직하는 사회적 규칙이며, ‘여성’과 ‘남성’, 그리고 젠더 모두 여러 권력관계가 교차하는 가운데 사회적 실천을 반복하며 수행적으로 구성되는 범주라고 주장했다. 젠더가 ‘관계적’이라면, 차별적 구조 속에 종속된 여성은 물론 그 구조 내에서 지배의 권한을 누리는 남성을 이해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여성’의 지위를 이해하기 위해 ‘남성’의 지위를, ‘여성성’의 의미와 효과를 이해하기 위해 ‘남성성’의 의미와 효과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한편, 코넬의 ‘남성성’ 논의가 갖는 의미는 젠더를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집단 간 관계만으로 파악하지 않고, 남성 범주의 이질성을 인정한 가운데 남성 내부의 관계로 시야를 넓힌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권력관계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반복된 실천으로 형성되는 ‘남성’은 그 의미가 가변적이고 불안정하며, 이 가운데 구성되는 ‘남성성’은 동질적이라기보다 이질적인 복수의 것이다. 코넬은 남성성을 생물학적 남성이 소유한 정체성으로 보는 본질주의적 정의, 현실에서 남성들의 행동을 파악해 목록화함으로써 파악하고자 하는 실증주의적 정의, 남성이 도달해야 할 기준이자 이상으로 보는 규범적 정의 모두를 거부하고 이를 복수의 ‘관계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 같은 이해 속에 코넬은 복수의 남성성을 ‘헤게모니적 남성성’, ‘종속적 남성성’, ‘공모적 남성성’, ‘주변화된 남성성’으로 개념화한다. 이때 ‘헤게모니’, ‘종속’, ‘공모’, ‘주변화’는 모두 고정된 의미가 아닌, 여성성과 남성성 간의 관계적 속성을 보여주는 말이다. 남성성은 역사, 사회, 정치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끊임없이 경합하고 변화하는 역동적인 범주로, 그것의 내용이 아니라 남성성들의 배치와 그 효과를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수준에서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종속이라는 젠더관계를 보증하는 것으로, 동의를 통해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한 이상적인 남성성이다. ‘종속적 남성성’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에서 상징적으로 배제된 남성성으로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코넬은 남성 동성애자를 ‘종속적 남성성’의 대표적 사례로 들면서 남성 동성애자들이 쉽게 여성성으로 환원되고 이 가운데 차별과 배제를 겪으며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지배하에 놓인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실현할 수 없는 남성들이 젠더 관계를 묵인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지배를 통해 가부장적 배당금이라는 이득을 얻는 형태는 ‘공모적 남성성’이라고 부른다. ‘헤게모니’, ‘종속’, ‘공모’가 ‘여성성’과의 관계 속에 젠더라는 사회적 실천의 구조를 형성하는 반면, 계급, 인종 등 다른 사회적 구조와 젠더가 만나 새로운 남성성과 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코넬은 이를 ‘주변화된 남성성’이라고 부르며,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실현할 수단과 자원이 부재한 이들이 실천하는 ‘주변화된 남성성’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코넬의 논의에서 널리 알려진 부분은 이처럼 복수의 남성성을 이론화한 것이지만(1부), 『남성성/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남성성을 독해하고 분석하는 풍부한 사례를 뒤이어 보여준다. 코넬은 2부에서 남성들의 생애사 연구를 통해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남성들이 어떻게 유사한 남성성을 실천하거나 분기하는지, 3부에서는 근대 이후 남성성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힘들이 복수의 남성성들을 배치하는 사회적 조건에 어떻게 관련되는지 살펴보면서 남성성의 사회적 구성과 변동의 양상을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남성성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성차별이라는 구조와 질서를 만드는지, 각자 다른 상황과 지위에서 남성성을 실천하는 이들이 어떻게 이 질서에 이바지하는지, 소수만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실천할 수 있음에도 이것이 어떻게 동의와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는지 설명하는 코넬의 논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남성성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안티-페미니즘을 내세우며 젊은 남성들을 이용하는 정치, ‘페미가 싫어서’ 계엄과 폭력을 옹호하는 실천, 그 가운데 이루어진 비상계엄 선언을 폭력과 가해, 분노와 괴롭힘을 제어하는데 실패한 ‘폭주하는 남성성’으로 포착하고, 이를 젠더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다양한 남성성 실천으로 이해하고자 한 시도는 그 한 예이다(한국성폭력 상담소 기획, 『폭주하는 남성성』, 동녘, 2025). 코넬의 연구를 자원으로 삼아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들의 배치와 실천의 변형, 이 가운데 발견되는 젠더 질서의 동요가 적극적으로 해석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