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은 답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말하기
― C.더글러스 러미스, 김종철·최성현 옮김,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개정판), 녹색평론사, 2011
윤은성(시인, 기후생태 활동가)
기후위기를 체감하게 되면서 나는 점차 민주주의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구 지표면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부를 독점한 일부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벌이는 파괴적 활동과 착취 시스템에 의해, 생태계는 전에 없이 ‘절멸’을 향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기후위기에 대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더 이상 착취에 가담하지 않고 지구의 존재들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가.
누군가는 기후정의행진에 나서거나 시위를 조직하고 생태학살 현장을 지킨다. 새만금과 새만금신공항 건설 예정지인 수라갯벌 또는 다른 신공항건설 예정지로 오래된 자생 동백림이 깎여버릴 상황에 놓인 가덕도를 찾는다. 또 누군가는 닫혔던 세종보 수문이 한동안 개방된 후, 서서히 원형을 회복해가기 시작한 금강을 찾는다. 그곳에 새로이 형성된 모래톱에서 멸종위기종 생물들을 다시 마주하며 그들에게 사죄한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감사 좀 제대로 해달라고, 토건사업을 그쳐달라고 촉구하기 위해 법원에 제출할 서명을 받는 이들도 있다. 낙동강의 독성 강물을 바라보며 이제는 ‘녹조라떼’라는 자조조차 하지 못하는 채로 신음한다. 누군가는 화석연료 체제에서 재생에너지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싸우며 대도시에서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라고 에너지 불평등에 대해 간곡하게 말한다. 10년 전의 밀양 송전탑 행정대집행에 대해 그리고 현재 경주 월성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암 발병으로 인한 이주대책수립을 촉구하는 긴 투쟁에 대해 빠짐없이 증언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지난한 싸움으로 이어진다.
그사이 누군가는 성공 가능성이 낮고 천문학적인 액수가 투입되는 석유 시추를 시도한다. 중대재해 발생 확률이 높은 노후화된 핵발전소를 수명 연장하며, 새로운 핵발전소를 추가로 짓는 데에 박차를 가한다. 농부들이 상승해버린 평균기온에 적응할 새 없이. 기온이 변화해버린 지역 상황에 맞는 새로운 작물을 다시 찾아낼 새도 없이. 폭염 속에서 일하다 쓰러지는 노동자를 그 누구도 돌보지 않고 책임조차 회피하는 바로 이 시점의 일들. 이 모든 게 지금이 기후비상사태임을 모두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던 2024년의 일이다. 언제까지 이 같은 소식들을 들어야 하는 것일지.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이하 『경제성장』)는 얇은 책이다. 2002년에 한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많은 이들이 읽은 이 책을, 사두고 오랫동안 읽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제목이 너무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기후재난과 기후위기 대응, 생태계 파괴, 동물권 및 반(反)종차별 논의 등 최근 정말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듯 쏟아지는 많은 책과 자료와 모임과 활동들을 따라가다 보면 계속해서 새로운 경악할 일들과 마주하게 된다. 날마다 너무나 아픈 소식들이 쏟아지며 날로 자본의 움직임이 교묘해지는 이 시점에, 20여 년 전의 이 책이 제목의 명료함에 비해 무언가 정확한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정확한 진단을 앞서 하고 있었을까 봐 지레 그 따끔한 질문 쪽으로 선뜻 마음을 열지 못했다.
나는 2022년 관악구 반지하에 살던 세 모녀가 폭우에 갇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사건과 함께 그해 장마가 내게 깊이 각인됐다는 걸 느끼곤 한다. 당시 나는 기후위기가 더는 위기가 아니라 재난 그 자체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후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체계가 생겼다. 기후위기 앞에 서면서 혼란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을 알게 되어 홀가분했다. 의미 없이 사회에서 성과를 추구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고 막상 그러려고 보니 성과를 추구하는 데에 이미 길들어 내적인 균열과 부침을 많이 겪는 내가 안쓰러웠고, 때론 미웠으며, 동시에 대견했다.
이 책을 읽은 건 기후위기 그리고 생태계 파괴 앞에서 최근 많이 논의되는 ‘커먼즈’나 ‘돌봄’과 같은 밀도로 민주주의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러미스의 또 다른 책 『래디컬 민주주의』(한티재, 2024)를 먼저 읽게 되면서였다. 『래디컬 민주주의』는 출간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우리나라에는 2024년 번역 출간되었다. 87년에 한국에서 태어난 나는 민주주의를 시민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것, 군부독재 이후의 사회체제라는 의미로 내면화했던 듯하다. 『래디컬 민주주의』를 읽으며 평화와 존중이 그 근간이며 단위의 규모가 어떻건 ‘참여’ 민주주의 안에서 주체들이 성원권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가 서로를 돌보는 ‘인프라’여야 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경제체제일 수 없다. 이 지점이 기후비상사태 속 우리에게 중요한 대응의 단초가 되어준다. 저자는 『래디컬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에서 이에 대해 힘주어 말한다. 경제 논리로 누군가 착취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에서는 고립과 생존경쟁에 내몰린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와 결합하지 않은, 래디컬한 민주주의는 다르다. 서로를 돌본다. 굳이 누군가와 비교해 자신의 결여를 채우려 들지 않으며, 있는 것 안에서 자급자족한다. 서로를 경제적인 이유로 헤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으므로 안전하다. 그와 같은 민주주의는 차이를 차별로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들을 존중할 것이다.
그런 민주주의라면 나는 얼마든지 성원으로서 참여하고 싶었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어를 모르는 채로도 이미 참여‘되고’ 있는 것으로서, 민주주의적 장치가 상식으로서 공기처럼 가득한 사회를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기후위기와 생태파괴를 가속화하는 것도 모자라 전쟁을 원조하고 그린워싱을 일삼으며, 식민주의적인 발상으로 우주까지 개척을 시도하려는 자본의 위력 앞에서 속지 않겠다고, 계속해서 동료들과 함께 이 땅에 속하여 상호 연대하겠다고 선언하고 싶었다.
『래디컬 민주주의』에 이어 『경제 성장』에서도 같은 주제가 반복된다. 저자가 힘을 주어 설명하는 것 중 하나는 ‘발전(development)’에 대한 통찰이다. 어휘 “develop”은 자동사지 타동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개발도상국을) 발전시킨다”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 글로벌 북반구를 발전의 이상으로 삼아 그들은 애초에 그들이 말하는 ’발전‘이 불필요했던 피식민지 선주민들을 착취하는 구조를 확립했다. 이런 장면들을 떠올릴 때 선주민의 입장에 동화되어 화가 난다. 서글프다. 내가 당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과연 나는 『경제성장』를 읽다가 화가 나고 말았다. 그건 너무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사상가인 저자는 미국에서 일본으로 가 도쿄 쓰다대학에서 1980년부터 강의를 했고 퇴임 이후에는 오키나와에서 활동하고 있다. 20년 전의 저자도 지겨워하며 말하듯 착취를 성장으로 둔갑시키는 이데올로기에 ‘지겨울 만큼’ 지지 않고 기후위기에 대해 목소리를 함께 내보자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이 바뀔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바꾸는 힘은 바로 각각의 주체들에게 있다. 거기에서부터 자신감과 밝은 기운을 얻는다. 저자의 활기에 기대어 더, 더 ‘성장’ 이데올로기를 지겨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