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핵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토머스 셸링, 이경남․남영숙 옮김, 『갈등의 전략』, 한국경제신문, 2013
구갑우(북한대학원대 교수)
『갈등의 전략』(1960, 개정판 1980)을 쓴 토머스 셸링(Thomas Schelling, 1921~2016)은 2005년 12월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당시 기념강연의 제목은 ‘놀라울 따름인 60년: 히로시마의 유산’(『미시동기와 거시행동』, 한국어판 2009)이었다. 셸링은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투하한 이후, 핵전쟁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경제학자로서 1950~1960년대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를 둘러싼 갈등을 상호의존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게임’으로 접근해 왔기에 셸링의 물음이 놀랍지는 않았다. 다시금 야만적 전쟁의 시대에 특히, 핵국가 러시아, 이스라엘, 미국, 영국, 프랑스, 북한이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전쟁이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는 시기에, 전쟁을 겪었던 한반도가 임박한 핵전쟁의 장소가 될 수도 있는 시대에, 셸링의 질문을 소환한다.
1960년에 처음 나온 『갈등의 전략』은, 셸링이 미래에 할 질문의 답을 담았다. 셸링과 그의 동료들이 고안한 핵전쟁 예방 기제는 ‘상호 억제(deterrence)’였다. 셸링의 간략한 정의에 따르면, 억제는 결과의 두려움 때문에 행동을 삼가게끔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8세기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Jeremy Bentham)은 범죄인이 충분히 합리적이라면 처벌의 비용이 범죄의 잠재적 편익보다 클 때 범죄의 ‘억제’(determent)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다. ‘핵억제’는 적국이 핵전쟁을 시도한다면 핵무기로 보복과 응징을 하겠다는 조건부 의지표현(commitment)으로 적국에 대한 심리적 강압의 한 형태다.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핵독점이 깨지자 소련에 대한 핵 선제타격까지 고려했던 미국이 소련의 핵무기와 공존하는 방법을 찾았고 그 결과가 억제 개념의 발견이었다. 물론 억제가 냉전시대 미국의 핵심 군사전략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억제는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의 선택이라는 반론도 있다.
셸링이 전개하는 논리의 매력은 억제를 도출하는 과정에서의 반직관적 사고에 있다. 소련과 갈등하던 미국을 위해 개발된 이론이지만 핵을 둘러싼 남북미 갈등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갈등의 전략』에서 갈등은 흥정(bargaining)과 사실상 동의어다. 전략은 군사적 개념이 아니다. 셸링에게 전략은 행위자들의 결정의 상호의존성과 서로의 행동에 관한 기대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게임이론의 용어다. 『갈등의 전략』에 등장하는 핵억제와 연관된 개념들인 ‘위협과 약속’, ‘벼랑끝전술’(brinkmanship), ‘신뢰성’(credibility), ‘공포의 균형’, ‘안정’(stability) 등등을 활용하여 2013년 정도부터 시작된 한반도 핵갈등의 역사와 현재의 위기까지를 북한을 중심으로 간략히 기술한다.
북한은 2013년 3월 경제·핵 병진노선을 시작하며 ‘자위적 핵보유국’이 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헌법에 핵보유국을 명시했고 자위적 핵보유국을 공고화하는 국내법도 제정했다. 갈등하는 국가들과 소통이 없는 상태에서 위협과 약속이 담긴 자기 구속적 조치였다. 그 이후 핵실험과 핵 운반수단인 탄도미사일 실험을 반복하며 핵능력을 제고했다.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자동차를 가정한 치킨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방법은 운전대를 뽑아 밖으로 던지는 것이다.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기 위해 스스로 강제한 직진 이외의 선택지가 없다고 밝힌 것이다. 비합리성의 합리성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벼랑끝전술을 통해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겠다는 신호의 신뢰성을 높이고자 했다. 북한이 다른 국가와 달리 핵과 미사일 실험의 상세 내용을 공개하는 이유도 신호의 신뢰성을 높이려는 조치로 해석될 수 있다. 북한은 2017년 11월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형을 실험하고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전략무기를 개발하는 다른 국가들이 보여주지 않는 행태다. 이후, 자신들을 전략국가로 명명하고 대화의 장에 등장했다. 2018~2019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동안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했다. 그 시기 북한은 핵군축을 평화체제와 교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남북미의 서로 다른 기대가 수렴되지는 않았다.
2019년 말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실패로 끝나면서 북한은 다시금 ‘반격능력’에 중점을 둔 핵능력 제고의 길로 복귀했다. 2021년 1월 열린 ‘조선로동당 8차대회’에서는 ‘힘의 균형’에 입각한 평화를 재확인했다. 핵 선제공격을 받더라도 반격할 수 있는 핵 운반체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등의 실험을 재개했다. 2024년 10월 시험 발사한 화성19형은 은폐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었다. 결국, 한반도에서는 미국이 한국에 확장억제를 제공하는 핵기반동맹과 핵보유국 북한이 맞서는 상태가 되었다. 양측 모두 힘에 입각한 평화를 언급하지만 선제타격보다는 반격능력을 강조하며 대립하고 있다. 자칫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군사적 충돌은 서로 자제하는 상태다. 2024년 6월 북한이 러시아와 동맹조약을 체결하면서 한미동맹 대 북러동맹의 대립구도도 추가되었다.
셸링은 『갈등의 전략』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섬멸할 수 있는 ‘공포의 균형’과 양측이 모두 상대를 섬멸할 수 있는 ‘공포의 균형’을 구분했다. 후자의 공포의 균형을 셸링은 볼모의 교환에 비유하곤 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으로 미국을 위협하지만 미국과 공포의 균형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한이 미국에 보내는 위협신호는 한국에 대한 확장억제를 제한하는 기능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로 국한한다면 서로를 섬멸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셸링에 따르면, 상호 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균형이 아니라 균형의 ‘안정’이다. 균형은 어느 쪽이 선제공격을 해도 상대가 반격할 능력을 파괴할 수 없을 때만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안정은 양측 모두에게 무력갈등을 위한 유인이 없는 상태다. 셸링의 논리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균형의 안정은 결국 북한의 반격능력을 인정할 때 가능한 길이다. 미국과 소련은 1960년대 후반 서로의 억제전략을 이해할 수 있었을 때 군비통제나 군축협상과 같은 협력의 길로 갔다.
『갈등의 전략』은 상호 억제의 안정을 위해 핵능력 제고를 정당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른바 억제의 역설이다. 전쟁을 폭력적 협상으로 생각한 셸링은 베트남-미국 전쟁에서 북베트남에 보내는 값비싼 신호인 징벌적 폭격을 제안했고, 미국은 이 폭격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셸링이 예견한 것처럼 빠른 시간 내에 협상의 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베트남은 굴복하지 않았고 전쟁은 장기전이 되었다. 셸링이 냉전의 ‘전사’(warrior)로 비난받는 이유다. 셸링도 200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연설에서 핵전쟁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로, 억제와 함께 핵무기 사용이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금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2024년 10월 다시금 전쟁의 시대에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벨위원회는 핵무기의 폐기와 항구적 평화를 실천해 온 피폭자들의 반핵·평화운동이 핵 금기 확립에 기여했음을 인정했다. 자칫 상상할 수 없는 참화를 만드는 핵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는 지금, 핵전쟁을 예방하는 인간적 억제력으로서 반핵·평화운동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