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21일
출처: 제공_열린책들
   

공존의 대안을 어디서 찾을까

: 라시드 할리디, 유강은 옮김,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열린책들, 2021)

정욱식(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평화네트워크 대표)

나는 10월 7일 팔레스타인 정파인 하마스의 기습적이고 야만적인 이스라엘 공격과 이스라엘의 대학살극을 방불케 하는 보복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중동 정세가 많이 안정화되어있는 줄 알았다.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이 2020년에 바레인 및 아랍에미레이트와 정식 수교를 맺었고, 올해 3월에는 중국의 중재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또 9월 들어서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국교 수립이 초읽기에 들어갔고, 9월 말에는 백악관 안보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이 “중동 지역은 지난 20년보다 오늘날 더 조용하다”고 말한 뉴스도 접했다. 그래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필자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만큼 필자 역시 미국 등 서방 언론과 이를 베껴쓰기에 바쁜 국내 언론에 물들어 있었고, 또 이-팔 분쟁에 무지했던 셈이다.

때마침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관련해 책 한권을 선정해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봤다. ‘이-팔 분쟁의 기원과 본질을 깊이 있게 다룬 책을 소개해달라’고 말이다. 소개받은 책은 라시드 할리디가 쓴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이었다.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즈』도 강력히 추천한 책이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역작이라는 느낌이 들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저자의 이력부터 시선을 사로잡았다. 대대로 고위직을 배출한 팔레스타인 가문의 후손,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미국과 영국에서 자라고 공부하면서 품었을 이들 나라에 대한 양가감정,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무능했던 유엔에 근무한 아버지로부터의 영향,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 수석 총무를 맡았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서 보낸 3년간(1962~1965)의 생활 등이 그러했다. 이러한 이력이 말해주듯 할리디는 가문이 보관해온 방대한 자료와 본인을 포함한 친족의 경험, 그리고 학자로서 축적해온 학문적 성과를 책에 녹여냈다. 특히 그가 한국어판 서문에 쓴 것처럼, 한국인 역시 식민지배와 분할, 그리고 전쟁을 경험했기에 이 책의 울림은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도 있다. 제국의 식민지 경험이 대개 그러했듯이 일제는 조선인을 수탈과 차별, 그리고 동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반면 시오니즘을 앞세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아랍계 주민을 축출과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다. 할리디가 이를 ‘정착민 식민주의’라고 규정한 까닭이다. 또 우리의 해방과 국가 건설 과정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탈식민주의와 궤를 같이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는 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비호하에 탈식민주의라는 세계적 흐름과 정반대로 진행됐다. 무엇보다도 탈식민주의 시대의 많은 민족들이 국제사회에서 존재를 인정받았던 반면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없는 존재처럼 취급받았다. 할리디는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이 지점에서 찾는다.

그 시발점은 그가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의 시발점으로 잡은 1917년이었다. 그해에 영국이 벨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했는데, 이러한 결정을 하면서 정작 94%에 달했던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계 주민들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 그 이후 이스라엘 건국과 뒤이은 여러 차례 중동 전쟁 과정에서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채택 과정에서도 팔레스타인은 없는 존재처럼 간주되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국제사회에서 팔레스타인 존재의 부각은 팔레스타인이 저항에 나서고 이스라엘이 무자비하게 진압·살해·축출하면서 막대한 피를 흘릴 때 비로소 이뤄졌다. 저자는 이를 ‘6번의 선전포고’라고 표현했는데, 포연이 가라앉을 때마다 이-팔 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 역시 차갑게 식곤 했다.

할리디는 1917~2017년을 팔레스타인의 한 세기로 구분한다. 그렇다면 100년 전쟁 이후 다음 세기에 대한 그의 전망은 어땠을까? 그는 “두 번째 세기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새롭고 한층 더 파괴적인 접근법으로 특정지어질 것”이라며 “미국이 이스라엘, 그리고 페르시아만의 절대왕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우방들과 긴밀하게 협조할 것”이라는 데에서 이유를 찾았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어기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했고 정착촌 확대도 묵인했다. 또 앞서 소개한 것처럼 중동의 친미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수교를 중재했고,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원조도 크게 늘렸다.

전쟁,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학살도 계속되고 있었다. 2022년에는 팔레스타인 주민 204명이, 올해는 9월까지 230명이 이스라엘군과 유대정착민의 폭력에 목숨을 잃었다. 또 1264명이 행정구금 상태에 있었다. 가자지구는 2006년부터 사실상 전면적으로 봉쇄되면서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데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 되어갔다.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국가테러에 대한 보복 테러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셈이다. 정당화될 수는 없는 전쟁범죄에 해당되지만 말이다.

저자는 무기력과 특권 및 부패로 얼룩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외교노선도, 이스라엘의 민간인까지도 표적에 넣은 하마스의 무장투쟁도 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미국이 항상 이스라엘의 편을 들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미국을 이-팔 분쟁의 공정한 중재자로 간주하는 것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일갈한다. 100년 전쟁을 돌아보면, 미국 정부와 의회는 자신의 전략적 이해관계와 선거에 미칠 영향을 우선시해왔다는 것이다. 아랍계 미국인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이 유대계 미국인보다 현격하게 낮고, 미국이 이스라엘과 중동의 여러 독재국가를 친미로 만든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에 전략적 가치를 부여할 동기도 작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의 근거는 있는 것일까? 할리디는 이스라엘 주류의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상수로 두면서도 몇 가지 희망의 근거가 있다고 썼다. 아랍인들 다수가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가슴에 품고 있고 이에 동감하는 세계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 미국 내에서도 맹목적인 이스라엘 비호와 지원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는 점, 세계정세가 미국 단극체제에서 다극화로 이동하고 있는 와중에 중국, 인도, 러시아 등이 ‘두 국가 모델’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저자는 이에 근거해 미국에 의존적이었던 팔레스타인의 외교 노선과 반작용을 일으켰던 하마스의 무장투쟁부터 청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 내부의 화해와 협력을 도모하고 공존을 선호하는 이스라엘인들과의 연대와 외교노선의 다변화를 통해 이-팔이 평화적이고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호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