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권 정치’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 제레미 리프킨, 이정배 옮김, 『생명권정치학』(대화출판사, 1996)
조효제(성공회대 사회학전공 교수)
서평의 형식으로 오래 전의 도서를 소개하는 일은 흔치 않다. 제레미 리프킨의 『생명권정치학』은 출간 때에도 호평을 받았지만 작금의 현실에 주는 함의가 큰 책이어서 다시 음미할 가치가 충분하다. 리프킨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인간은 살아있는 지구행성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어야 하고 생명권 보전에 실패하면 안전, 안정, 안보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가려면 익숙한 전제들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국민국가의 틀에 갇힌 국제정치, 다국적기업이 무한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 경제와 환경을 분리해서 보는 태도,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환상, 군사력에 기댄 냉전식 안전보장 관념, 이런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리프킨은 15세기 잉글랜드에서 시작된 인클로저 운동이 오늘날 부활했다고 지적한다. 땅, 공기, 전자기장, 외계, 심지어 유전자까지 인간이 통제하는 영역으로 재정의되고, 하나하나가 상업적 사유화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커먼즈의 상품화는 계몽주의의 총합이자 귀결이고, 근대 서구문명의 종언을 예고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인간이성으로 자연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면 정치, 경제, 군사의 절대적 안정이 올 것이라 믿었지만 그것이 지구행성 차원의 생화학적 조성 변화와 인간존재의 기반인 생명권의 붕괴로 이어지다니.
『생명권정치학』은 이런 비극에서 벗어나려면 인간의 의식과 철학이 완전히 변해야 하고 안보와 안정을 완전히 다르게 개념화하며 생태적 공존에 부합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평화는 생명권 보전에 의해 좌우된다. 리프킨의 주장을 현재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입해 보면 생명권 패러다임이 어째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인간안보와 사회생태적 정의가 어떻게 밀접하게 연계되었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1967년 이래 이스라엘은 점령지의 생태계와 지형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경작지를 약탈하고 환경을 파괴했으며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착취했다. 생태학살(에코사이드)을 통해 팔레스타인 대지는 아파르트헤이트의 땅으로 전락했다.
팔레스타인의 전통적 생태환경을 유럽식 식생과 풍광으로 대체해 온 것 자체가 아파르트헤이트 진행 과정이었다. 올리브, 무화과, 참나무, 케럽, 산사나무를 캐낸 자리에 유럽산 소나무를 대량으로 식목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그것은 전통문화의 파괴이자, 생경한 지형의 강요, 더 나아가 주민들의 사회적·역사적 정체성의 단절을 의미했다. 소나무는 물을 많이 흡수해 주변의 하천을 말라붙게 한다. 불에 타기 쉬운 목질 탓에 팔레스타인 땅은 잦은 산불 재난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의 공해유발 업체가 이주해 왔고 대규모 쓰레기 매립장이 여기저기 들어섰으며, 이스라엘의 생활하수를 배출하고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요르단 강물의 90퍼센트 이상을 막아 버렸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건강은 그렇게 해서 망가졌다. 이스라엘의 건축용 석재 중 25퍼센트 이상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불법적으로 채석되어 온 것이다.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매년 34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한다.
가자지역의 생태학살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군 작전이 있을 때마다 건물이 파괴되면서 분진이 대기오염을 악화시켰다. 상수도 처리시설도 대거 훼손되었다. 하수처리 시설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오폐수가 바다로 직접 흘러들어가고 주민의 공중보건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번 전쟁 이전에 이미 가자지역의 물 97퍼센트가 WHO기준으로 보아 식수로 부적합한 수준이었다. 군사작전에 사용된 백린탄과 집속탄에 의한 화학물질 오염도 심각했다.
HD현대건설기계의 굴착기가 이스라엘과 가자를 가르는 차단벽 근처의 땅을 밀어냈다. 주민들이 농사를 못 짓게 하고 군 감시용 시야를 확보할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펜스 지대에 제초제를 대량으로 공중살포한 것은 마치 베트남전에서의 에이전트 오렌지 살포를 연상케 한다. 글리포세이트, 옥시플로오르펜, 디우론 등 잠재적 발암물질인 제초제 칵테일이 국경 부근의 녹지를 황폐화시켰다. 2014년 이래 그렇잖아도 좁은 가자지역에서 서울시 금천구만한 넓이의 농지가 경작불능 지역이 되었다.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던 시트러스 광귤나무 숲은 뽑혀 나가거나 말라 비틀어졌다. 이스라엘 법정은 보상을 요구하는 가자쪽 농민의 요구는 묵살하고 이스라엘 쪽 농민에게는 보상 판결을 내렸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자행한 생태학살은 녹색식민주의의 교과서적인 사례다. 팔레스타인의 마을을 파괴한 자리에 공원, 숲, 녹지를 조성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귀향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이런 조치를 녹지 조성이라고 선전했으니 전형적인 그린워싱이다. 이런 류의 ‘정착 식민형 에코사이드’와 ‘정체성 말살형 제노사이드’가 연계된 것이 오늘날 가자 사태의 생태적 맥락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여성과 아동은 특히 더 취약한 상태에 놓였다. 즉, 국지적 생명권 정치를 배경으로 하여 사회적 고통이 가중된 상황에서 비극적인 유혈충돌과 말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 넓게 보면 중동 전체가 물부족, 식량부족, 폭염 속에서 생명권 갈등정치에다 지정학 갈등정치가 포개지는 양상으로 신음 중이다.
생명권 정치가 기존의 지정학적 갈등이나 냉전형 구조적 폭력을 대체할 것이라고 리프킨이 예견했던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런 식으로 대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저가 냉전이 종료되던 시점에 나왔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요즘의 시각으로 해석하자면 행성적 차원에서 생명권 정치가 상수가 된 바탕 위에서 지정학적 충돌과 국민국가형 대결이 병존하는 현실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991년에 『생명권정치학』을 쓴 저자의 통찰이나 1996년에 번역본을 낸 옮긴이의 안목에 새삼 놀라게 된다.
내가 보기에 생명권의 정치학에 부수되는 또 다른 특징은 시간 관념의 정치적 전유다. 예컨대 2050년까지 탄소중립, 이번 세기말까지 기온 상승 2도 내 억제와 같은 시한 설정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시간의 정치’다. 그러니 생명권 위기를 논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 시간의 의미에 모든 것을 거는 행성 차원의 지성적 내기와 비슷하다. 아마도 우리 시대 지식인들이 마주 한 새로운 도전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봤을 때 『생명권정치학』은 21세기 미래의 도전에 용기있게 응답했던 20세기 말의 특출한 저작이라 할 만하다.□